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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미술관 산책]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필립 파레노 개인전

 

 

전 세계 미술계가 주목하는 프랑스 작가 ‘필립 파레노’의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리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90년대 초기작부터 최초로 공개되는 대형 신작까지 실재와 가상, 자연과 기술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국내 최초 대규모 개인전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새롭고 다양하게 끊임없이 접근하는 시각 예술가

 

Philippe Parreno. 사진 김제원_Photo Studio_kim_je_won


 
프랑스 작가인 필립 파레노는 전통적 작가 개념에 도전하며 오브제 생산자로서 작가의 역할을 거부합니다. 그는 전시와 작품과의 역동적 관계를 탐구하고 ‘시간의 경험’을 제안하며 90년대 현대미술 형태의 혁신적 전환을 이끌었어요. 

작업 초기부터 미술계의 촉매자 역할을 했던 파레노는 동료 작가들, 과학자, 음악가, 건축가 등 다수의 전문가와 협업을 기획하고, 지적자산의 공유와 이상적 공동체를 제안하며 비평적 예술 실천에 앞장서 왔습니다. 파레노에게 전시는 단순히 작품을 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창작 행위인 것이죠. 그의 관심은 오브제를 생산하는 일보다 그것이 전시에서 보여지는 형식과 그 상호작용에 있습니다. 이에 파레노의 전시는 시간을 감각하고 경험하는 유동적이고 열린 플랫폼이 됩니다.

작가는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 및 첨단 정보기술과 같은 다양한 미디어의 방법론과 어휘를 활용하며 현실과 허구의 한계를 허물었어요. 여러 층위로 복잡하게 짜여있는 그의 작업은 결코 하나의 입장이나 매체로 환원될 수 없는 끊임없는 움직임 그 자체입니다. 

 

 


전시 공간을 압도하는 새로운 목소리, 《보이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장



전시 제목 《보이스(VOICES)》는 하나의 목소리가 아닌 ‘다수의 목소리’입니다. ‘다수의 목소리’는 파레노 작업의 핵심요소로, 대상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주체로 변신합니다. 파레노의 작업에서 ‘목소리’는 유령이자 알고리즘으로서 생명체의 출현과 소멸을 주관하며 진실과 허구를 말하는 주체로 볼 수 있습니다. 

전시는 과거에 파편적으로 존재했던 ‘다수의 목소리’를 하나로 집결시키며, 지금 여기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을지 질문합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작가는 하나의 새로운 목소리를 창조하죠.

이번 전시에서는 배우 배두나의 실제 목소리가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합니다. 배두나와의 협업으로 탄생된 신작 <∂A>는 근원을 알 수 없는 웅얼거림으로 시작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인공언어 창조자가 만든 새로운 언어 ‘∂A’를 습득하며, 발화의 주체로 성장하는 작품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설치 작품으로 구현된 전시

 


이번 전시는 30여년에 걸친 파레노의 활동을 대표하는 주요 작품 및 신작으로 구성되었으며 미술관의 야외 데크, 로비, M2, 블랙박스와 그라운드갤러리 전관에서 대규모로 전개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래픽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뮤지션, 언어학자, 사운드 전문가, 배우 등 여러 전문가와의 협업으로 영상, 사운드, 조각,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로 제작한 작가의 90년대 초기작을 포함한 주요 작품들과 리움미술관이 제작 지원한 대형 야외 신작을 선보입니다.

 

 

막(膜),&nbsp;2024


 
미술관 야외 데크에 설치된 신작 <막(膜)>은 타워처럼 보이지만 색다른 인지력을 가진 인공 두뇌로 새롭게 탄생한 목소리인 <∂A>(델타에이)와 상호작용하며 전시의 모든 요소를 조율합니다. 센서 기능을 갖고 있어서 기온, 습도, 풍량, 소음, 대기오염, 미세한 진동까지 지상의 모든 환경 요소를 수집하고 미술관 내부로 보내죠. 

이렇게 유입된 데이터는 사운드로 변환되기도 하고 새로운 목소리를 자극하기도 하며 전시를 활성화합니다. 이 작품에서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는 인공지능에 의해 실재하는 가상의 목소리로 재탄생되는데요. 이 새로운 목소리는 새로운 언어인 ‘∂A’를 배우며 성장합니다.

리움미술관 M2 1층에서는 여러 협업자들과 제작한 1990년대~2000년대 초기작을 중심으로 전시가 펼쳐집니다. 프랑스 그래픽 디자인 듀오 M/M(Paris), 네덜란드 패션사진 듀오 이네즈 앤 비누드, 동료 작가 피에르 위그 등과 제작했던 10여 점의 작품을 한 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통합적인 경험의 장으로 전시를 제안

 

내&nbsp;방은&nbsp;또&nbsp;다른&nbsp;어항,&nbsp;2022


 
리움미술관 M2 B1층에서는 부유하는 물고기와 함께 전시장을 하나의 거대한 어항으로 만든〈내 방은 또 다른 어항〉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또한 동심 가득했던 눈사람이 일그러지고 더러워진 모습을 하고 있는 〈리얼리티 파크의 눈사람〉도 볼 수 있어요. 태양이 사라지고 멸망한 지구의 해질 무렵 석양 빛으로 영원히 물든 상태를 시각화한 설치작품 〈석양빛 만(灣), 가브리엘 타드, 지저 인간: 미래 역사의 단편〉은 공간 전체가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상상과 현실이 중첩된 몽환적인 분위기로 전환시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조종되는 것과 조종하는 것, 실존하는 것과 허상 간에 유사 인간의 시선과 장소에 대한 기억 속 재현은 필립 파레노의 작품 세계에 중요한 주제입니다.

미술관 로비의 대형 스크린에는 두 영상이 있어요. 하나는 컴퓨터 그래픽으로만 제작된 <대낮의 올빼미>로 거의 정지된 듯한 물가의 풍경을 보여줍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야외 데크에 설치된 타워와 인공두뇌가 포착하는 모든 환경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영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창 밖을 향하고 있는 <일광반사경>은 햇빛을 반사하고 로비의 벽을 타고 커다란 광원을 그리며 외부와 내부를 연결합니다.

 

차양 연작, 2016-2023

 


블랙박스 공간은 영화관으로 변신합니다. 이곳 영화관의 스크린은 그냥 평범한 스크린이 아닌데요. <차양>은 극장 입구의 화려한 불빛 차양에 영감을 받아 제작된 연작입니다. 20세기 초중반 미국 할리우드에서 유행한 차양은 극장 안에서 상영되고 있던 영화의 제목과 출연 배우들의 이름을 알리는 광고판 역할도 했습니다.

파레노는 극장 간판의 원래 모습에서 영화 관련 주요 정보를 제거하고, 할로겐의 빛과 차양의 껍데기만 남겼습니다. 영화 대신 불빛 너머의 공간과 시간에 주목하게 만드는 이 연작은 현실을 공감각적으로 직시하게 하는 한편, 아직 오지 않은 현실 너머의 시공간을 암시하는 듯한 빛의 신호를 퍼뜨립니다. 

전시장에 소개되는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연작 <차양>은 미술관 데크에서 온도, 습도, 풍량 등의 변화하는 기후 데이터를 수집하는 신작 <막(膜)>과 연결되어 야외의 환경 조건에 따라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하면서 실내와 바깥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줍니다. 

 

 


각기 다른 시공간에서 탄생한 다층적 의미가 담긴 다수의 작품 전시 



 

마릴린, 2012



대중문화의 아이콘인 여배우 ‘마릴린 먼로’를 환생시킨 영상 〈마릴린〉은 기계 장치를 통해 시선과 음성, 필체를 구현하여 유령처럼 허구의 눈속임으로 관객을 이끌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 카메라가 마릴린 먼로의 신체가 되어 그의 시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우리의 시선을 그의 시점과 일치시킵니다. 두 번째로는 컴퓨터가 그의 음성과 고유의 운율을 재구성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필체를 학습한 로봇 한 대가 그의 손놀림을 재생해 화면 속 종이에 글씨를 써 내려가는데요. 이로써 영상은 화면에서 활용된 세 가지 장치를 통해 실재와 허구의 경계 위에 전설적인 배우의 존재를 다시 불러옵니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전시장



그라운드갤러리는 ‘키네틱 공간’으로 변신했습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깜박이고 움직이며 관람객은 섬광을 인식하며 찰나를 경험하게 됩니다. 벽을 따라 〈깜빡이는 불빛 56개〉의 공연이 펼쳐지고, 공간을 가로지르며 천천히 움직이는 〈움직이는 벽〉은 마치 건물의 벽면이 떨어져 나와 움직이는 듯합니다. 

이 밖에도 필립 파레노는 동료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에게 관람객과 실시간으로 상호작용하는 작품을 의뢰했는데요. 관람객은 전시 기간 동안 블랙박스와 그라운드 갤러리를 연결하는 두 대의 에스컬레이터에서 티노 세갈의 신작 <이렇게 장식하기(쉬헤라자드 파레노)(보이스 버전)>와 언제든지 교감할 수 있어요.

리움미술관 M2 2층에서는 작품 <현실 더 이상 안돼(후반부)>와 <말하는 돌>이 교육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선보이고 있습니다. 두 작품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작품 감상뿐만 아니라 직접 창작의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활동이 이루어지며,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자 인형극을 만들며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는 동시에 창의적인 표현을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 진행됩니다.

 

필립 파레노 《보이스(VOICES)》
위치  리움미술관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55길 60-16)
전시기간 2024년 02월 28일(수) ~ 2024년 07월 07일(일)
관람시간 화요일~일요일, 10:00~18:00 (입장 마감 17:30)
홈페이지 https://www.leeumhoam.org/leeum

 


세계를 향한 열린 미술관, 리움미술관

 

리움미술관&nbsp;전경



1965년 삼성문화재단 설립 이후 소중한 문화 유산을 보전하고 대중에게 알리고자 노력해 온 삼성미술관은 2004년 서울 한남동에 미술관 건물을 신축하면서 리움미술관을 개관했어요. 수준 높은 소장품전과 기획전 개최 등 그간의 괄목할만한 활동과 성과로 리움미술관은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성장했습니다.

리움미술관은 한국 고유의 미를 담고 있는 전통미술과 생동하는 현대미술, 시대적 가치를 반영한 국제미술이 함께 공존하는 세계를 향한 열린 미술관입니다. 리움은 과거와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함께 모색하고, 시대와 장르를 초월한 융합미술관으로 관객과 함께 향유하고 소통하는 문화적 공간입니다. 

 

필립&nbsp;파레노&nbsp;《보이스(VOICES)》&nbsp;전시전경



필립 파레노는 예술작품과 전시를 대하는 방식을 실험하면서, 시간과 기억, 인식과 경험, 관객과 예술의 관계를 탐구해 왔습니다. 그는 개별 작품을 집결해 선보이는 사건이 아니라 경험의 장으로서 전시를 제안하고 있어요. 그래서 미술관 내부와 외부를 걸어 다니며 벌어지는 일을 보고, 듣고,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면서 전시에 몰입할 수 있게 되는데요. 이번 전시에서 파레노가 펼치는 미술관 안에서의 마술을 경험해 보시길 바랍니다.

 


※ 이미지 제공: 리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