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연재

네덜란드의 자랑, 빛의 화가 <렘브란트>

안녕하세요, 신도리코의 신대리입니다.


화가 렘브란트 하르먼손 판 레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은 네덜란드 미술의 황금시대를 연 작가입니다. 빛으로 다양한 회화적 효과를 나타낸 그는 명암의 시조라 불립니다. 색채와 명암의 대조를 빛으로 보여줌으로써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나간 렘브란트의 작품들을 감상해봅시다.




▲ 눈이 머는 삼손(1636)_시립미술연구소



빛의 마술사로 불리다


렘브란트는 명암과 색채를 이용해 내면의 모습까지 표현한 17세기 대표 화가입니다. 그는 빛과 어둠을 이용해 그 작품 전체의 이미지나 스토리를 표현했습니다. 렘브란트의 대표적인 작품 <튈프박사의 해부학 강의>,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에서 빛을 자유자재로 활용한 화법을 볼 수 있습니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는 ‘튈프 박사’가 사람들과 함께 시신을 해부하는 모습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어두운 방 검은 옷의 사람들 가운데, 시신과 튈프 박사의 손은 밝게 표현돼 대비를 이룹니다. 명암 기법을 통해, 렘브란트가 인물이 아닌 해부학을 하고 있는 행위를 강조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니콜라스 튈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1632)_마우리츠하이스 왕립미술관



<야경>이라고도 불리는 <프란스 바닝코크 대장의 부대>는 단체 초상화로 유명합니다. 중앙에 두 신사를 기점으로 자유분방한 구도를 이루고 있습니다. 프란스 바닝코크 대장과 빌렘 반 라위턴뷔르흐 중위를 중앙으로 다소 어수선하게 사람들이 서있습니다. 이 작품은 강렬한 색채와 빛과 어둠을 적절히 이용하여 작품에 생동감과 긴장감을 주었습니다. 그는 명암을 이용해 극적인 장면 연출뿐만 아니라 인물들의 움직임도 나타냈습니다. 생생한 인물묘사와 입체적인 공간표현도 빛과 그림자를 활용한 결과입니다.




▲ 프란스 바닝 코크 대장의 부대(1606)_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그 당시 일반적인 초상화들이 정적이고 정면을 향한 배치였다면 렘브란트는 그런 기존의 상식을 벗어난 그림을 그렸습니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회화를 만들어간 렘브란트는 이후 빛의 마술사로 불리며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가 됐습니다.



렘브란트가 끝까지 사랑한 유일한 모델


렘브란트는 많은 자화상을 남긴 화가로 유명합니다. 그는 젊은 시절 초상화의 대가로 불리며 인기를 누렸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신만의 회화형식을 강조하면서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았습니다.




▲ (좌) 자화상(34세)(1640)_런던 내셔널 갤러리 / (우) 자화상(53세)(1659)_위싱턴 국립미술관



그러나 오랜 세월 그의 모델을 자처했던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렘브란트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젊은 시절부터 노년기까지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겼습니다. 젊은 패기가 느껴지는 자화상부터 명예와 부를 잃은 후 그려진 그의 마지막 자화상 <쾰른 자화상>까지 그의 그림을 시대순으로 보면 일생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 퀼른 자화상(1668)_발라프-리하르츠 미술관



<쾰른 자화상>에는 생활고 속에서 아내와 아들의 죽음을 겪는 등 아픔의 시절을 보낸 렘브란트의 말년이 담겨 있습니다. 자신의 힘든 모습도 미세한 웃음으로 솔직하게 표현한 <쾰른 자화상>는 보는 이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줍니다. <쾰른 자화상>을 보면 렘브란트가 단순히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표현한 화가였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렘브란트의 영향력


렘브란트는 살아 생전 호평보다는 혹평을 더 많이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능력은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유화, 에칭, 소묘 등 다양한 기법을 이용해 종교화, 신화화, 초상화, 풍경화, 풍속화, 정물화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렘브란트가 완성한 독특한 판화 장르인 에칭은 제노바의 조반니 카스틸리오네,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같은 후세의 판화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17세기 네덜란드 회화 세계를 설명할 때, 렘브란트를 언급하지 않고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시대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렘브란트의 회화적 요소는 큰 관심거리였습니다.




▲ 구약성서에 나온 두 인물의 초상, 일명 “유대인 신부”(1665~1669)_암스테르담 국립물박관



렘브란트의 <유대인 신부>를 본 들라크루아는 ‘이런 그림을 그리려면 몇 번은 죽었다 깨어나야 한다’고 극찬을 했고, 반 고흐 또한 ‘이 그림 앞에 앉아 2주를 더 보낼 수 있게 해 준다면 내 수명에서 10년이라도 떼어주겠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누구보다 다양한 작품과 독특한 빛의 표현을 남긴 렘브란트. 그의 예술가적 삶에 대한 평가는 앞으로도 빛과 환희로 가득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