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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소식

[신도역사] SINDOH 50년사_대한민국 사무기기의 역사를 만나다 - 60~70년대

 

안녕하세요? 신대리입니다.

이번 포스트에서는 앞선 포스팅에서 소개해드린 신도리코 역사 특집, 그 두 번째 이야기를 전해드리려 합니다. 대부분의 문서작업이 수작업으로 이뤄지던 1960년대, 한국의 사무기기 시장을 바꿔놓은 신도리코의 60~70년대 이야기! 그럼 이제 시작해볼까요~?

 

 

 

 

개성상인, 복사기를 만나다

 

대한민국 사무기기의 역사를 개척해온 신도리코, 그 긴 여정의 시작은 1960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개성 출신의 가헌 우상기 회장은 그해 7월 7일 새로운 사업을 시작합니다.

 

<신도교역 창립자 가헌 우상기 회장. 개성상인의 대표 인물 중 한 명>

 

 

사업의 아이템은 바로 복사기. 당시만 해도 거의 대부분의 문서 작업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기회로 보게된 일본의 복사기 광고를 본 그는 사무기기가 대한민국에 반드시 필요한 물건이라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한 남자의 결심이 한국 사무기기의 역사를 바꾸게 된 것이죠.

 

 

 

<1960.09 미우만백화점 1층에 설치된 신도교역의 복사기 전시장 모습>

 

 

회사 설립 후 복사기의 존재를 모르는 대중들에게 첨단기기를 알리고, 새로운 사무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1960년 9월, 신도는 미우만백화점 1층에 전시장을 열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복사기를 선보였습니다. 감광지 한 장을 복사기에 집어넣자 선명한 글자들이 찍혀 나오는 것을 보며 사람들은 편리한 사무기기 '복사기'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죠.

 

 

 

사무기기 대중화의 시작

 

신도교역의 복사기 판매가 있기 전까지, 호적등본 한 통을 발급받기 위해서는 하루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고 합니다. 신청용지를 제출하고 나면, 서기가 원본 호적을 찾아 그것을 먹지에 대고 똑같이 쓰는 방식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죠. 지금 생각하면 참 원시적이고 비효율적이죠?

 

신도교역은 복사기가 우리나라의 행정업무를 획기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시발점이 된다고 믿고, 서울시 및 관공서 위주의 영업을 개시합니다. 그 결과 1962년 4월 16일부터 서울시는 호적 등초본 발급업무를 복사기로 수행하기 시작합니다. 오직 수작업에만 의존했던 사무행정이 신도교역의 복사기 도입으로 일대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죠.

 

 

 

국내 최초의 복사기 개발

 

1960년 초반, 우리나라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으로 공업화가 급격하게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그 핵심은 수출증대와 수입대체를 위한 국산화인 것이죠. 신도리코는 복사기와 같은 첨단 제품을 국산화하기 위한 노력을 시작합니다.

 

그 첫 번째 노력의 결과로 1964년 1월, 신도리코는 국산 청사진 복사기용 특수 감광지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후 1964년 12월, 신도리코는 국내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개발에 성공합니다.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이 집약된 복사기를 우리 기술로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신도리코의 기술진은 전인미답의 길을 걸으며 복사기 개발에 성공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복사기 Ricopy 555 모습>

 

 

이렇게 개발된 복사기는 저렴한 가격으로 성능은 수입품과 나란히 할 정도로 할만큼 훌륭한 제품이었다고 합니다. Ricopy 555 출시는 세간의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신도리코는 급격하게 사세를 확장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성동구 하왕십리에 공장을 증설하게 되었으며 1966년 208%, 1967년 171%의 매출 성장을 지속하게 됩니다.

 

 

<1967.07, 전자복사기전시회를 마친 직 후 기념촬영 사진>

 

 

복사기 판매가 호조를 보이자 1967년 신도는 영업과 고객관리를 전문적으로 시행하기 위해 신도사무기판매를 설립합니다. 가헌 우상기 회장은 개성상인 출신답게 영업교육과 신용을 대단히 중요시했고, 채용된 직원들은 모두가 4년제 대학에서 학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 출신을 배치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도는 점점 발전을 거듭해갔으며, 1969년 6월에는 최첨단 전자 복사기 BS-1 개발에 성공합니다. 이 제품은 우리 기술로 만든 최초의 전자 복사기를 전국에 알릴 수 있게 된 제품이라는 점에 큰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BS-1은 박정희 대통령도 크게 관심을 가진 제품이었으며, 69년 12월 10일 우량공산품장려위원회 주최 대회에서 우수품으로 선정되었고, 전국상품전시회에서는 상공부장관 우수상을 수상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신도리코의 첫 걸음

 

1969년 12월, 신도교역은 리코와 파트너십 계약을 맺고 신도리코를 출범합니다. 새로운 이름 아래 우리나라 사무기기 역사를 개척해온 신도리코가 드디어 첫 발을 내딪은 셈이죠. 다음해 5월, 신도리코는 현재 신도리코 서울본사가 위치한 성수동공장을 착공합니다.

 

 

<1970.04.16, 신도리코 설립기념 총회 기념사진>

 

 

71년 5월, 서울 성수동에서는 드디어 신도리코 공장 준공식을 열렸고, 이 공장이 가동된 직후 부터 전자 복사기와 복사용지의 대량생산, 시판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수동 공장은 신도리코 도약의 터전이자 사무기기 개척의 중심으로 부각되기 시작합니다.

 

<1970년대 신도리코 성수동 공장 전경>

 

 

성수동공장 준공은 신도리코의 성장과 사무기기 시장의 확대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중화학공업 육성정책, 수출 중심의 경제정책으로 인한 경제 발전으로 사무환경의 개선, 업무효율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신도리코 최초의 수출품, 전자 계산기

 

<1973.08, RICOMAC 1621R은 1976년까지 세계각지로 수출되며 우리나라 전자제품 수출에 공헌하였다>

 

 

신도리코는 복사기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자제품 개발에도 치중했습니다. 1973년 8월, 국내 전자 계산기 산업이 전무했던 시기에 국내 기술로 탁상용 전자 계산기 개발에 성공했으며 이후 해외 수출에 주력합니다. 첫 생산량은 2,400대. 최초로 생산된 전자 계산기는 동남아 등지로 전량 수출되었으며, 이후 전자 계산기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향상시키면서 새로운 모델은 생산해갔으며, 1976년까지 세계 각지로 수출했습니다.

 

 

 

국내 최초 보통용지 복사기 개발

 

 

 

<국내 최초의 보통용지 복사기 신도리코 DT 1200>

 

 

보통용지 복사기는 감광체를 중간 매개물로 이용하는 기술을 적용하여 일반 용지로 복사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특수용지를 사용해온 기존 복사기 시장에 큰 변화를 가져올 제품인데요, 신도리코는 1년 여의 연구개발을 통해 1975년 9월, 국내 최초의 보통용지 복사기 DT 1200 개발에 성공합니다. 이 제품은 사전예약을 통해 전량 판매되는 성과를 거두죠.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큰 관심을 받은 제품으로 유명한데요, 1977년 7월 8일, 경향신문에 그 내용이 아래와 같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7월 7일 낮, 경제기획원장관실에서 월례경제동향을 보고받고, 회의 때 새마을훈장을 수여 받은 지도자들과 곰탕으로 점심을 나누며 농사 상황, 유원지 실태, 새마을 성과 등에 대해 환담했다.

다음은 이들의 대화록이다.

 

대통령 : (우상기 신도리코 사장에게) 아주 훌륭한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나라 기업이 이렇게 해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일들을 교과서처럼 다하고 있더군요. 복사기를 수출도 하나요?

 

우사장 : 3년치를 계약했습니다. 국내 시장에서도 판매상황이 좋은데, 이제 애프터서비스를 직접 해서 올해는 국내 수요의 85% 정도를 판매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 : 내 사무실에서 쓰는 것도 그 복사기이지요. 복사기에 기름기가 없어 글씨를 쓸 수 있어 더욱 좋더군요.

 

 

 

 

신도리코, 앞선 마케팅을 선보이다

 

1974년 9월, 미도파백화점에서는 '신도리코 비지니스 머신쇼'가 열렸습니다. 수많은 인파들로 붐빈 이 행사에서 신도리코가 전시한 제품은 팩시밀리, 금전등록기, 문서세단기, 고차수식용 계산기 등 총 37종이었습니다. 국내에 처음 선보인 기기들이 많았답니다. 이 행사를 계기로 신도리코는 종합 사무기기 제조기업으로 위상을 확고히 다지게 되었고, 매년 신도리코 비지니스 머신쇼를 개최했습니다.

 

이와 동시에 회사명을 신도사무기주식회사로 변경하고 복사기 판매를 넘어 다양한 사무기기를 도입하는 등 사업영역을 넓혀갔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핵심은 우수한 영업사원의 역량인데요, 이를 위해 신도리코는 최고의 시설에서 영역사원 교육을 진행하였고, 해외 연수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영업사관학교라 불릴만큼 영업사원들의 역량 개발에 매진했습니다.

 

또한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복사기의 가치를 판매하라'라는 목표 아래 지켜나갔습니다. 사후관리가 특히 중요한 복사기 유지보수를 위해 신도리코는 기계의 성능, 유지, 관리, 보수의 책임을 다하는 고객밀착형 서비스 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신도리코의 영업사원들은 관공서와 여러 민간기업으로 나가 선진 사무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노력했고, 1970년대 우리나라 사무기기 시장이 크게 확대된 데에는 이들의 힘찬 노력이 큰 몫을 했죠.

 

 

 

공장새마을운동으로 우수기업으로 성장한 신도리코

 

1977년 7월 7일, 창립 17주년 기념식이 있는 날 신도리코는 또 다른 경사를 맞이했습니다. 우상기 사장이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운동 협동장을 수여받은 것입니다. 1972년부터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온 성과였죠.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새마을훈장을 수여받는 우상기 회장>

 

 

신도리코의 공장새마을운동은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첫 번째는 전 직원이 주인의식을 갖고 일하는 '자조 정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협동과 근면'의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당시 신도리코가 진행하던 QC활동과 일맥상통합니다.

 

신도리코는 '기업주는 근로자를 가족처럼, 근로자는 공장일을 내 일 처럼'이라는 새마을운동의 표어를 실천하는데 적극 노력했으며, 최고경영진을 물론 임원에서 사원까지 가나안 농군학교에 두 차례씩 입교하여 교육을 이수하면서 건강한 국가관과 근검절약 정신을 익혀나갔습니다. 그 결과 신도리코는 지속성장일 이어나갔고, 대외수상의 영광으로 이어져 구성원들의 자긍심을 높여줍니다. 신도리코가 새마을운동으로 수상한 기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1976년 3월  대통령 표창, 노사협조증진

 1977년 11월 새마을훈장 협동상 수훈

 1977년 11월 대통령 표창(단체 표창),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1978년 6월  대통령 감사패, 새마을운동

 1979년 12월 새마을훈장 노력상 수훈

 

 

 

 

<1975년부터 82년까지 한국생산성본부가 선정한 '한국의 기업-생산성상'을 8년 연속 수상>

 

 

이외에도 1977년 성실 납세의 실천으로 석탑산업훈장을, 78년 5월에는 한국능률협회에서 시상하는 '한국의 경영자상', 75년부터 82년까지 8년 연속 한국생산성본부의 '한국의 기업 - 생산성상'을 수상합니다. 이렇듯 신도리코의 임직원들은 1970년대 한국 사무기기의 기반을 조성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1980년대를 준비기 시작합니다. 세계를 향한 신도리코의 본격적인 출발이 서서히 가시회되고 있는 것이죠.

 

 

1980년~1990년 역사기는 다음 포스팅에서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이상 신대리였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