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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미술관 산책] 미술, 자연, 사람이 하나로 어우러진 강릉 솔올미술관

 

 

대표적인 관광지인 강원도 강릉에는 순백색으로 만들어진 미술관이 있습니다. 통창으로 탁 트인 개방감이 일품인 강릉의 공공미술관 ‘솔올미술관’인데요. 현대건축의 거장인 리처드 마이어가 소속된 마이어 파트너스에서 만든 건물로 미술과 건축이 하나로 구상된 미술관으로 올해 2월 개관하였습니다. 휴가철을 맞아 강릉으로 떠날 계획이라면 솔올미술관에서 열리는 수준 높은 전시와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시길 추천하며 현재 진행중인 두 가지 전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시1 : 《아그네스 마틴 : 완벽의 순간들》

 

〈무제〉, 1955, 캔버스에 유채, 금속 페인트, 118.1 x 168.3 cm, 페이스 갤러리©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아그네스 마틴(Agnes Martin, 1912~2004)은 캐나다 출생의 미국 여성 미술가로 1950년대 이후의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사람입니다. 마틴의 주요 작품 54점이 소개되는 이번 전시는 리움미술관, 일본의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과 나고야시 미술관,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과 디아파운데이션을 비롯하여 페이스 갤러리, 조지 에코노무 컬렉션을 포함한 해외 소장자의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이번 전시는 테이트 모던(Tate Modern Museum) 관장을 역임한 이화여대 초빙석좌교수 프란시스 모리스 (Frances Morris)를 게스트 큐레이터로 초대하여 기획되었습니다. 

 


절제의 방식으로 아름다움과 순수의 완벽함 추구

 

이번 전시회는 순수 추상을 추구한 미국 작가 아그네스 마틴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한국에서의 첫 미술관 전시입니다. 아그네스 마틴은 컬럼비아대학 시절 선불교와 도교 사상을 접했고 이는 그의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요. 같은 시기, 한국에서는 아방가르드한 실험미술과 단색화가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마틴의 작업을 동양 사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한편, 그녀의 실험적이고 명상적인 작업을 동세대 아시아 작가의 작업과 나란히 두고 서로의 관계와 동조성을 고찰하는 자리입니다.

전시는 1955년, 아그네스 마틴이 구상 회화를 벗어나기 시작한 시점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이 시기 마틴의 작업은 유기적이고 생체적인 형태를 벗어나 원형, 삼각형, 사각형과 같이 좀 더 형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언어와 차분한 색상으로 옮겨갑니다. 1950년대 후반에는 대상의 재현과 모방이 사라지고, 다양한 선과 격자 형태가 나타납니다. 1964년에 제작된 〈나무〉(The Tree)는 마틴의 이러한 변화를 잘 보여주는 혁신적이고 미니멀한 작품입니다.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1967년, 아그네스 마틴은 뉴욕에서의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여행을 떠납니다. 이후 1974년부터 뉴멕시코주 시골 마을인 타오스에 은둔하며 작업을 이어갑니다. 그리고 2004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30여 년 동안 동일한 방식으로 작업합니다. 이 시기 마틴은 명상을 통해 얻은 ‘영감’을 회화적으로 표현하며 고유한 이미지를 찾아가는데요. ‘완벽함’을 추구한 마틴은 작품의 크기, 색상, 기법 등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그 안에서 색과 선을 무한히 반복하고 변주하며 화면을 채웠습니다.

1977년에서 1992년 사이 제작된 회색 모노크롬 회화는 마틴의 전체 작업 중 가장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운 작품들입니다. 전시에서 소개되는 여덟 점의 회색 모노크롬 작품은 작가가 설정한 제한 안에서 형태, 색조, 질감의 무한한 변주를 보여주며 미학적 절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전시는 아그네스 마틴이 삶의 마지막 10년 동안 몰입했던 시리즈를 소개합니다. 1993년 건강상의 이유로 양로원에서 지내던 마틴은 매일 작업실을 찾으며 붓을 놓지 않았습니다. 다만 몸이 쇠약해지며 작품 크기도 줄었지요. 1999년 제작된 여덟 점의 연작 ‘순수한 사랑’(Innocent Love)에 대해 마틴은 고요한 명상 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그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회색 모노크롬 작품들과 달리 반투명한 광채와 기쁨, 예찬이 담긴 ‘순수한 사랑’ 연작과 함께 마틴의 예술 여정은 끝을 맺습니다. 

〈아기들이 오는 곳〉(순수한 사랑 시리즈), 1999,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52.4 x 152.4 cm, 디아파운데이션 © Estate of Agnes Martin / Artists Rights Society (ARS), New York – SACK, Seoul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은 감상자에게 느리게 보는 기회를 선사합니다. 감상자는 침묵, 씻겨 나간 색채, 부드럽게 흐려지는 테두리, 열정적인 연필 자국 등 마틴의 세심한 작업 과정을 고요함 가운데 천천히 음미할 수 있습니다. 마틴은 자신의 작품은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며 작품을 개인적인 경험이나 의미, 삶에 대한 통찰과 연결 짓는 것을 꺼렸습니다. 그리고 작품의 가치는 감상하는 자에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음악을 듣는 것과 유사하다고 합니다. 마틴은 한 작품을 감상하는 경험에 대해 밀려오고 빠져나가는 파도, 하늘을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구름처럼 끊임없이 변화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무언가를 바라보는 것이라고 비유했습니다. 그것은 곧 반복적이고 사색적이며 시간을 초월하고 행복을 자아내는 경험, 그리고 아그네스 마틴과 관객에게 ‘완벽의 순간들’을 선사하는 경험입니다.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위치  솔올미술관 전시실 2 & 3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원대로 45)
전시기간 2024년 5월 4일(토) ~ 2024년 8월 25일(일)
관람시간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매주 월요일 휴관
홈페이지 https://sorolartmuseum.org/

 



전시 2 : 《In Dialog: 정상화》

 


솔올미술관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세계와 미학적 대화를 이어 나가는 전시 프로젝트 《In Dialog: 정상화》를 선보입니다. ‘In Dialog’는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기 위해 시리즈로기획된 전시 프로젝트입니다.

한국의 단색조 추상 회화를 대표하는 정상화(Chung Sang-hwa, 鄭相和, 1932~)의 작품은 아그네스 마틴의 작품과 함께 논의할만합니다. 아그네스 마틴의 회화가 작가의 순수한 정신성을 절제된 언어를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할 무렵, 한국에서는 아방가르드한 실험미술과 함께 수행성이 강조된 단색조 추상회화가 중요한 움직임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Chung Sang-Hwa_2 © Gallery Hyundai>



완벽한 사각 평면 모양의 정제된 백색 회화

정상화의 ‘백색추상’에는 오랜 시간 한국, 일본, 프랑스를 넘나들며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경험한 작가의 작업세계가 집약적으로 농축되어 있습니다. 이번 전시는 수행성이 강조된 정상화의 기하학적 회화와 시적 감수성이 담긴 아그네스 마틴 작품 간의 미학적 관계를 탐구하기 위해 가장 절제된 정상화의 백색추상 대표작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무제 76-8〉, 1976, 캔버스에 아크릴, 227.3 x 181.8 cm © 정상화, 이미지 갤러리현대



느린 속도로 작품을 감상하면 화면 위 서로 연결된 작은 사각의 경계에서 들고나는 깊이를 느낄 수 있습니다. 고요하고 차분하며 정적이고 명상적인 색의 변주 앞에서 감상자의 시선은 깊이 빠져듭니다. 이러한 몰입의 경험은 정상화가 취하고 있는 고유하고 독특한 회화 기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의 작업은 이렇습니다. 우선 매지 않은 캔버스에 순백의 고령토를 덮어 바릅니다. 꾸덕꾸덕해진 캔버스를 가로세로 주름잡듯 접고 꺾어 금이 가면 뜯어내고 그 자리를 아크릴 물감으로 메웁니다. 바르고, 말리고, 꺾고, 접고, 뜯고, 메우는 과정이 반복의 반복을 거치면서 정상화 고유의 평면이 드러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생성된 정상화의 작품은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만들어진 그림이죠. 작업은 작가의 치밀한 계획에서 시작되지만 마치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듯 자연스럽게 확장됩니다. 완벽한 조화, 완벽한 균형, 완벽한 형태에 이르면 작가의 손은 멈추고 작품은 완성됩니다.  

〈무제 017-10-25〉, 2017, 캔버스에 아크릴, 고령토, 227.3 x 181.8 cm © 정상화, 이미지 갤러리현대>

 


정상화는 자신의 창작행위를 ‘일’이라 칭합니다. 창작행위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태도가 엿보이는데요. 작업을 대하는 태도와 그가 살아온 삶의 방식에서도 덧붙이거나 채우기보다 덜어내려는 흔적이 역력합니다. 평면에서 평면을 찾아 들어갈 뿐 읽어야 할 의미나 특정한 내러티브를 담지 않습니다. 드러내고 메우는 과정의 숱한 반복을 통해 평면 속에 깃들어 있는 무한대의 평면을 밝힙니다. 그만큼 작업의 과정과 작업 중 이루어지는 행위가 결정적입니다. 하나의 색 안에 녹아 있는 뉘앙스를 달리하는 무수한 색 그리고 시각적 촉각을 유발하는 미묘한 결의 움직임은 ‘하나의 전체’로 경험됩니다.

 

In Dialog: 정상화
위치  솔올미술관 전시실 1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원대로 45)
전시기간 2024년 5월 4일(토) ~ 2024년 8월 25일(일)
관람시간 화요일-일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매주 월요일 휴관
홈페이지 https://sorolartmuseum.org/

 



미술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솔올미술관 


 

솔올미술관 전경, 출처 : 솔올미술관 홈페이지



솔올미술관은 2024년 2월, 강릉의 새로운 공공미술관으로 개관하였습니다. ‘솔올’이라는 이름은 미술관이 자리한 지역의 옛 이름으로, ‘소나무가 많은 고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는데요. 솔올미술관은 미술과 건축이 하나로 구상된 미술관입니다. 형태와 재료, 구성의 단순함, 그리고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가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미술, 자연, 사람이 어우러지는 개방된 공간을 지향합니다. 미술로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솔올미술관의 비전은 내부와 외부의 상호작용을 강조한 마이어 파트너스(Meier Partners)의 건축으로 조화롭게 시각화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을 연결하여 우리미술의 미술사적 맥락을 조명하는 미술관입니다. 국내외 다양한 미술관 및 미술관계 기관과 소통하며 학술적 연구를 바탕으로 전시를 기획합니다. 또한 현대미술사 거장의 작품세계를 소개하고 역사적 의미와 예술적 가치를 조명합니다. 나아가 한국미술과 세계미술의 미학적 연결성을 찾아내어 우리 미술의 미술사적 가치를 세계미술계에 알리는 것이 미술관의 비전입니다.

솔올미술관 전경, 출처 : 솔올미술관 홈페이지



솔올미술관은 강릉의 새로운 문화예술 랜드마크로 강릉 시민과 강릉을 찾는 관광객들이 자연을 즐기고 세계적인 수준의 미술전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여 도시에 예술의 품격을 더하는 미술관입니다. 올 여름엔 탁 트인 푸른 강릉을 찾아 바다에선 시원한 파도를 몸으로 즐기고, 솔올미술관에선 아그네스 마틴과 정상화의 전시를 관람하며 마음을 다스려보는 휴가를 보내시는건 어떨까요?